언제쯤 떠날 수 있을까요.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친 상황에서 모두가 여행 본능을 꾹꾹 눌러가며 애써 참고 있죠. 그러다가도 요즘같이 화창한 날엔 불쑥 떠나고픈 마음이 고개를 들어 봅니다. 과연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긴 올까요? 물론 우리는 알고 있죠.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요. 그날을 위해 여행 갈 곳을 손꼽아 정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혹시 어디로 갈지 생각해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특별한 곳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포르투갈의 소도시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리스본이나 포르투 같은 관광지가 아닌, 자동차로 시원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중간중간 마주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죠. 그곳에서 며칠씩 보내는 여행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지금도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한번 떠나고 싶은 포르투갈의 작고 멋진 곳들을 현대트랜시스가 소개합니다.
동화 속 성곽 마을, 오비두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약 한 시간을 이동하면 오비두스가 있습니다. 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작은 성곽 마을이죠. 여왕의 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에 꼭 와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마을에 얽힌 특별한 이야기 때문인데요. 13세기 초, 동 디니스 왕은 이 마을을 각별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에게 이 마을을 결혼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왕비도 이곳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해요. 왕과 왕비의 눈에 들 정도의 마을은 대체 어떤 곳일까요.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그 매력을 알 것 같았습니다. 반질반질 닳아 있는 돌바닥은 성곽을 빙빙 돌며 아기자기한 골목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골목을 따라 양옆에는 나지막한 건물들이 촘촘히 서 있죠. 건물들은 모두 새하얀 색입니다. 중간중간 나무 창문이 뚫려 있어, 지붕만 버섯 모양이었다면 꼭 스머프들이 살고 있었을 것 같았죠. 나무 간판과 나무 화분이 잘 어울리는 작은 건물들은 대부분 귀여운 소품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왕이 아닌 누구라도 좋아할 풍경이었죠.
“진자?” 온통 흰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 사이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데 한 상인이 진자를 권합니다. 체리를 설탕에 재워 만든 이곳의 전통주입니다. 특이한 건 진자 잔이 초콜릿이라는 점이죠. 진자를 마시고 나서 초콜릿 잔을 한입 먹으면 훌륭한 안주가 됩니다. 이렇게 작고 예쁜 마을의 특산물이 술이라니, 그것도 초콜릿으로 술잔을 만들어 먹는다니! 그야말로 동화 속 술 익는 마을이라는 표현이 딱 맞지 싶습니다.
마을 안에 있는 빈티지한 민박에서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할머니 사장님이 시골집에 놀러 온 손자를 대하듯 푸근하게 맞아준 곳이었죠. 관광객이 모두 빠져나간 조용한 마을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건 참으로 특별한 경험입니다. 마치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게다가 이른 아침 성곽 골목을 천천히 걷고 있으면 도시의 찌든 때가 차분하게 씻겨나가는 느낌마저 들죠.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크고 작은 도시들을 돌았지만 이곳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습니다. 조용한 골목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던 시간이 그리 좋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파도를, 나자레
오비두스에서 다시 차를 몰아 해안을 따라 달렸습니다. 펠리체라는 해변을 지나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요? 마침내 나자레 해변에 도착했죠. 태양이 만들어낸 잡티 하나 없이 맑은 날씨가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모래사장은 완벽했고, 파라솔이 모여 있는 상상 속 해변의 모습이었죠.
나자레는 세상에서 가장 큰 파도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바람이 크게 부는 날이면 파고가 30m를 넘기며 일명 괴물 파도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어림잡아 아파트 10층 높이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서퍼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죠. 매년 국제적인 파도타기 대회가 열리고 각종 기록이 탄생하는 곳입니다. 서퍼라면 언젠가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로망과도 같은 곳입니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히말라야가 있다면, 서퍼들에게는 바로 이곳 나자레가 있는 것 아닐까요? 여름의 시작이라 아직 물이 차가웠지만 바다에는 신나게 파도를 가르는 서퍼들이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도 이곳으로 휴양을 온다고 하던데 왜 그러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듯했죠.
나자레는 서핑이 아니더라도 일상에 찌든 사람에게 망각을 선물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닷가 뒤쪽으로 흰색 벽돌집이 이어집니다. 게스트하우스나 민박 같은 곳들입니다. 집 앞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간판들은 ‘빈방 있음’을 알리는 표식입니다. 호텔스닷컴이나 에어비앤비에서도 예약할 수 없는 민박집에서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곳이 생긴 기분이었죠. 바다가 보이는 무심한 민박집에서 나자레 해변을 원 없이 즐겼어요. 유난히 쨍한 볕과 선들거리는 바람, 달달한 포트 와인까지. 분위기와 공기를 진공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가고 싶을 만큼 완벽한 날이었죠.
배 띄워 노는 곳, 아베이루
나자레에서 차를 몰아 북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를 이동하면 아베이루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도시 한가운데에 작은 운하가 흐르고 있죠. 그리고 바로 그 운하 위에 베니스의 곤돌라 같은 배가 둥실둥실 떠다닙니다. 총천연색의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배입니다. 여기가 놀이동산인가 싶을 정도로 작정하고 예쁘게 만들어놓은 도시죠.
과거 아베이루는 수초를 나르던 마을이었고 예쁜 배들 역시 과거에 수초를 날랐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여행자를 실어 나르고 있지만 말이죠. 알록달록한 배가 만들어내는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복잡한 생각은 싹 사라집니다. 암스테르담을 가로지르는 운하보다는 아담하지만, 배니스의 곤돌라보다는 화려한 배가 떠다니는 아베이루입니다. “이래도 안 이뻐? 이래도?”라며 여행자에게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여행자들은 그 배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죠.
“어디서 왔어?” 또 다른 여행자들입니다. 여행자는 여행자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라면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게 어색하지 않죠. 한국에서 왔고 포르투갈을 자동차로 여행 중이라고 했더니 신기해합니다. 한국 사람을 처음 봤다며, 본인들은 포르투갈에서 나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포르투에서부터 남쪽으로 오토바이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북쪽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중간에서 만난 셈이죠. 저는 그들에게 제가 앞으로 갈 도시에 대한 정보를 물었고, 그들은 내가 막 떠나온 나자레와 오비두스에 대해 물었습니다. 여행지에서 여행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큰 즐거움이 있을까요? 자리를 펴고 앉은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산들산들한 여름밤, 시원한 맥주 한 잔만 있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죠. 그렇게 유쾌했던 아베이루에서의 밤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랑꾼들의 마을, 코스타노바
아베이루에서 해안 쪽으로 차를 몰아 20분 정도 이동하면 코스타노바가 있습니다. 이곳은 아베이루와 멀지 않은 곳임에도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죠. 바다를 향해 나지막한 목조 주택들이 나란히 서 있는데, 외벽이 모두 흰 배경에 원색의 줄무늬입니다. 해변에서 멀리 마을 안쪽으로 가도 독특한 줄무늬는 계속 이어집니다. 마을 주민회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알록달록한 집들의 연속이죠. 인스타그램 인증샷에 열광하는 이들이 있다면 온종일 사진만 찍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마을입니다.
대체 포르투갈이 가진 매력의 끝은 어디일지 감탄하며 마을을 돌아보았습니다. 코스타노바 집들의 외벽이 이런 줄무늬를 가지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과거 이곳은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배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는 게 일상인 그런 마을 말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배를 타고 나간 이를 기다리는 남겨진 사람들의 심정은 매한가지 아니었을까요. 유독 안개가 자주 끼던 이 마을에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한 여인은 남편이 집을 쉽게 찾아올 방법을 생각해냈어요. 바로 외벽을 눈에 확 들어오는 원색으로 칠한 것입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자신들의 집을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했고, 그렇게 총천연색 마을이 탄생했습니다. 어부들은 줄무늬 외벽들 덕분에 먼바다에서도 마을을 알아보고 방향을 잡았으며 집도 이전보다 빠르게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만들어낸 일종의 등대였던 셈이죠.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나서 코스타노바를 걸으니 마음까지 예뻤던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의 애틋함이 전달되는 듯 했습니다.
책에 없는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나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곳에서 알게 된 이야기들입니다. 예쁘고 멋진 곳들을 보며 힐링하고 모험하며 세상의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것이 여행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남는 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소매치기를 만나 휴대폰과 함께 사진이 통째로 사라져버려도 그걸 또 이야기 삼아 그때를 추억하고 있는 걸 보니 더 그렇습니다. 결국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잊지 못할 이야기를 담아오기 위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포르투갈 소도시를 여행하면서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가득 담아왔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아름다운 포르투갈 소도시로 떠난다면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가져오게 될까요. 두고두고 기억될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를 응원하고 기대합니다.
글 서양수(<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 저자) 사진 서양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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