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BV, 미래 모빌리티의 새로운 패러다임

 

PBV는 목적 기반 자동차(Purpose Built Vehicle)의 약자입니다. 목적 기반 모빌리티(Purpose Built Mobility)로 지칭하기도 하죠. 개념은 간단합니다. 단어 그대로 특정한 용도(purpose)를 고려해 제작되는 자동차입니다. 용도가 뚜렷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인용 자동차, 그러니까 승용자동차와는 구별됩니다. 승객 운송용 택시나 미니버스, 화물배송 용도의 택배 차량이나 소형트럭, 냉동탑차 등 그간 ‘상용자동차’로 지칭해오던 다양한 상업활동 기반 자동차가 PBV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해오던 대로 상용차라고 부르면 될 것을 굳이 PBV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부르는 이유는 뭘까요? 우선은 ‘이동’의 개념이 진일보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동차는 승용차, 택시, 버스, 운송차량 등이 각각의 운행 영역 안에서 이동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혁신이 고도화되면서 자동차도 디지털 기기의 영역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모든 이동수단을 통합하고 연결해 이동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멀티모달 모빌리티(Multi-Modal Mobility)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멀티모달은 다중을 뜻하는 멀티(multi)와 인체의 감각적 양상을 뜻하는 모달리티(modality)의 합성어로, 여러 종류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해 다각도로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최근 오픈AI가 발표한 ChatGPT-4o도 멀티모달을 토대로 한 놀라운 AI 성능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죠. 자동차에 있어 멀티모달은 여러 종류의 이동수단을 활용해 다양한 니즈(승객, 화물 등)에 걸맞은 최적의 이동성(mobility)을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까운 예로는 네이버 지도나 티맵 내비게이션이 제공하는 대중교통의 최적경로 길안내 기능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에서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버스, 지하철 등의 노선 조합 정보로 제공되지요. 멀티모달 모빌리티는 머지않아 대중교통, 택시 등 도심 운송수단부터 KTX나 여객항공기와 같은 광역 운송수단, 심지어 전동킥보드나 자전거와 같은 공유형 개인 이동수단(PM, Personal Mobility)까지 조합해 하나의 경로로 안내하고 이동을 서비스하는 걸 목표로 합니다.  

 

현대차그룹이 추구하는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은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고 이동의 제약이 없는 심리스(Seamless) 모빌리티입니다

 

이중 PBV는 도심 운송수단을 설명하는 것으로, CES 2020에서 현대자동차가 소개한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Urban Air Mobility) 개념과 함께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UAM은 도심 내 주요 거점의 환승용 허브(에어 터미널)에 수직 이착륙을 하며 승객을 실어 나르는 소형 여객기입니다. 현대차는 UAM인 S-A1이 이착륙하는 허브에서 최종 목적지까지 승객을 수송하는 목적의 이동수단으로서 S-링크(S-Link)를 소개하며 PBV라는 개념을 함께 제안했습니다. S-링크 셔틀은 탑승객이 목적지로 이동하는 동안 식당, 카페, 호텔, 약국, 병원 등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주거•의료용 차량입니다. 자율주행 기반의 친환경 모빌리티로, 용도에 맞게 제작된 차량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E-GMP의 장점을 활용한 기아 EV9

 

PBV는 전기자동차를 기본으로 합니다. 내연기관을 쓰는 보디 온 프레임(Body on Frame, 강철 프레임 위에 차체를 얹는) 구조인 기존 상용차와 가장 큰 차이점이지요. 대표적인 배터리 전기차는 ‘전기 아키텍처’의 통합 설계로 이전 내연기관 차량보다 여유로운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앞뒤 바퀴를 차체 끝까지 최대한 밀어 공간 확보에 유리하고, 전체 공간에서 파워트레인을 포함한 각종 기계장치가 담기는 엔진 룸의 비중을 대폭 줄여 승객석이나 트렁크 룸을 넓히기에도 좋지요. 차량 앞뒤를 가로지르는 장치(변속기, 드라이브샤프트 등)가 없어 실내공간의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는 점도 공간활용에 이점이 됩니다. 
 


이 같은 배터리 전기차의 구조적인 특징에 힘입어 PBV는 보다 간편하게 다양한 형태의 차체를 ‘결합’합니다. 드라이버를 위한 최소한의 객실 공간을 고정된 형태로 둔 채 뒤쪽에는 이동 목적에 걸맞은 차체를 다양하게 변주해서 얹는 것입니다. 


승용차는 개인의 이동에 목적이 있어 실내공간도 개인 맞춤형으로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PBV는 이동의 목적이 명확합니다. A-B 지점으로의 이동이 필요한 승객이나 물건, 혹은 자유롭게 유동적으로 이동하며 더 많은 이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의료 서비스 등 모든 이동에 ‘필요’가 정해져 있습니다. 필요에 맞춰 제작된 목적 기반 차체를 배터리 전기차 플랫폼 위에 얹으면 특정의 PBV가 만들어지는 셈이지요. 


자율주행 기술이 더해지면 PBV의 효율은 더욱 극대화됩니다. 운전석이 점유하고 있던 공간을 확장해 승객, 화물, 기타 서비스를 위한 더 많은 공간으로 할애할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닙니다. 자율주행 기술은 자동차의 속성까지 변화시키고 있어요. 과거 운전자는 직접 조향하고 가속하고 감속하며 자동차를 ‘조종’했지만 고성능 카메라와 센서, 인공지능이 결합된 완전 자율주행차에서는 다른 탑승객과 마찬가지로 이동시간을 조종하는 데 보내는 대신 무언가를 ‘소비’하는 데에 쓸 수 있습니다. 
 

기아가 CES 2024에서 공개한 PV5의 실내 공간입니다. 시트 개발은 현대트랜시스가 참여했습니다

 

이 같은 변화에 부응하듯 자동차 제조사들은 2010년대 중후반부터 자율주행을 기반으로 하는 다채로운 이동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어떤 차는 호텔에 못지 않았고, 또 어떤 차량은 클럽에 버금가는 사교의 공간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자율주행 기술로 여객운송과 화물배송의 기능을 고도화한, PBV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요응답형 운송수단 개념도 이 무렵 등장했지요. 


무엇이 됐건 핵심은 공간이었습니다. 좀더 풀어서 말하면 ‘어떤 콘텐츠를 소비하는 공간’인지였지요. 알아서 움직이는 자동차 안에서라면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는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납니다. 주행정보는 기본이고 업무관련 자료, 소셜미디어, OTT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까지 무엇이든 즐길 수 있지요. 자연스럽게 자율주행 스터디 모델의 실내는 콘텐츠를 담아내는 디스플레이와 콘텐츠를 제어하는 사용자환경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몰두했습니다. 


승객이 몸을 얹는 시트에도 과거보다 많은 역할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뒤에 앉은 사람과 마주보며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든가, 장거리 이동 중에 단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든가, 혹은 완벽하게 독립적인 엔터테인먼트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PV5의 인테리어 콘셉트입니다. 필요에 따라 시트의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PBV에서는 시트의 기능이 조금 달라집니다. 개인의 편리보다는 목적에 맞춰 제작한 공간의 효율을 좀더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는 것이지요. 도심용 여객운송 PBV는 콤팩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납도 가능한 형태가 유리하지만, 장거리 이동용 PBV라면 항공기 일등석처럼 침대 기능까지 할 수 있는 여유롭고 아늑한 시트가 필요할 겁니다. 푸드트럭으로 쓰일 PBV라면 레일을 따라 이동 가능한 운전석과 조수석 시트 정도만 갖춰도 충분할 거고, 배송용 PBV라면 화물을 하나라도 더 실을 수 있도록 아예 시트를 걷어내는 게 유리하겠습니다. 


기아가 올해 1월 CES 2024에서 공개한 PV5에는 승객용 PBV를 위한 매우 모범적인 시트 시스템이 장착돼 있습니다. 현대트랜시스가 개발한 이 시트에는 공간 편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트 등받이를 앞뒤로 펼칠 수 있는 ‘플립’ 기능이 적용되었습니다. 시트 부피는 최소화하고 슬라이딩 기능을 더해서 승객 탑승의 편의성과 공간활용을 극대화한, 나아가 구조가 간단해 지금 당장 상용화한다 해도 무리가 없는 매우 영리한 아이디어였습니다.

2022년 UX 스튜디오 서울에서 공개됐던 반응형 PBV 시트 콘셉트


 

이에 앞서 현대자동차가 2022년 소개한 ‘반응형 PBV 시트 콘셉트’는 시트가 승객의 몸을 알아서 감지한 뒤 체형에 맞게 시트 모양을 만들어주는 기술이 특징입니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기다란 벤치 모양의 시트를 승객의 수와 체형 등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승객이 수시로 타고 내리는 PBV의 특성을 감안하면 대다수 승객에게 안락한 이동경험의 제공이 가능합니다. 

 

2022 UX 테크데이에서 공개된 현대트랜시스의 다목적 모빌리티 시트 시스템


 

2022년 현대트랜시스가 공개한 다목적 모빌리티 시스템 ‘HTVM21’ 모델에서도 탑승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트 기술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교통 약자를 위한 생체 신호 분석 기술, 유아 동반 가족 승객의 실내 공간 활용을 지원하는 메커니즘 기술 등 10가지 통합 시나리오 모드를 개발하여 자율주행 환경에서 모빌리티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고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는데요. 최근 공개한 ‘HTVM24’에서는 팝업 시트, 히든 시트 등 탑승자의 니즈에 따라 공간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변형 시트 구조를 통해 한층 진화한 다목적 모빌리티 공간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PBV 시트가 향후 어떤 편리를 제공할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적응형 시트(Adaptive seat), 자율주행, 인공지능과 결합한 PBV의 지향점은 결국 ‘개인 맞춤형’ 이동경험을 선사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맞게 조정된 안락한 시트에 몸을 기대고 인공지능 비서와 음성으로 상호 소통하며 증강현실 기술이 적용된 창문 디스플레이를 통해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모습. 어쩌면 우리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미래의 풍경일 수도 있습니다. 

 

■ 글. 김형준 (자동차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