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V(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자동차 공급망은 수직적 피라미드 구조에서 수평적 협업 네트워크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부품사가 단순 임가공 업체에서 벗어나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춘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을 핵심 메시지로 제시합니다. 결국 대기업과 협력사가 대등하게 손잡는 공생적 협업만이 산업 전환기의 생존 방정식이라는 통찰을 전합니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이 던진 생존 방정식: 공생적 협업 생태계

라틴어 ‘베히쿨름(Vehiculum)’은 생물이 아닌 무생물의 ‘탈 것’을 뜻합니다. 오랫동안 이 무생물은 공장에서 기계 부품 수만 개가 조립되는 순간, 그 기술적 가치가 고정되는 소비재였습니다. 엔진의 배기량이 얼마인지, 마력이 얼마나 높은지, 변속기의 단수가 몇 단인지가 자동차의 계급을 나누는 척도였습니다. 제조사가 스펙을 정하고 부품사는 단가에 맞춰 하드웨어를 납품하는 수직적 구조가 오랫동안 이 생태계를 지탱해 온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이 방식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핵심 경쟁 축이 엔진과 기계 장치라는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AI)으로 이동하는 이른바 ‘SDV(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시대가 본격화됐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동차는 단순한 부품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출고된 이후에도 무선(OTA) 업데이트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학습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피지컬 AI 시스템’으로 본질이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이 매달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며 새로운 기기처럼 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장 직관적인 변화는 우리가 매일 몸을 맞대고 앉는 '시트(Seat)'와 구동의 핵심인 '파워트레인(Powertrain)'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시트는 좋은 가죽을 씌우고 편안한 쿠션감만 갖추면 되는 아날로그 가구였지만, SDV 시대의 시트는 탑승객의 호흡과 맥박을 측정하는 생체 신호기가 되고, 자율주행 상황에서 위험이 감지되면 스스로 안전한 위치로 이동해 승객을 보호하는 '지능형 제어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파워트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식 기어의 맞물림을 넘어 도로 상황과 AI 내비게이션 정보를 미리 예측해 스스로 감속과 회생제동을 최적화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전동화와 SDV 대전환기 속에서 수많은 중소 부품사와 제조 생태계는 무엇을 준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제 한 기업이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해결하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화 속도가 인간의 내재화 속도를 앞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로벌 리더로 도약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직적 위계를 넘어 대등하게 손을 잡는 '공생적 협업'과 '동반성장'의 생태계입니다.

 

 

무너지는 피라미드, 거미줄이 되는 공급망

과거의 자동차 공급망은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완성차 업체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아래로 대형 부품사, 그리고 다시 규모가 작은 중소 협력사가 줄을 서는 철저한 종속적 구조였습니다. 위에서 도면과 스펙을 주면 아래에선 정해진 단가와 납품 기일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결과 효율성은 높았지만 유연성은 낮은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SDV와 AI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생태계에선 이 피라미드가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고성능 컴퓨터 인프라와 제어 알고리즘을 한두 기업이 단독으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SW 스타트업들이 공급망의 핵심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업종 간 경계가 무너지면서 전통적인 서열 구조는 수평적이고 촘촘한 ‘거미줄형 네트워크’로 재편되는 중입니다. 이 변화 속에서 과거의 '구매-납품'이라는 단순 거래 관계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기계 부품은 규격만 맞으면 조립의 형태로 완성되지만 소프트웨어는 다릅니다. 차량 전체를 제어하는 시스템과 조향, 제동, 시트의 세부 제어 애플리케이션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차는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상황에서 옛날 방식으로 단가에 맞춰 납품만 요구하는 방식은 생태계 전체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로, '플러그인 솔루션 파트너'로 거듭나는 협력사 

이러한 산업 구조의 수평적 재편 속에서 협력사 역시 스스로를 ‘쇠를 깎고 플라스틱을 찍어내는 임가공 업체’로 규정해온 관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제품의 가치를 기계적 구조가 아닌 소프트웨어적 접근으로 해결하는 ‘솔루션 프로바이더(Solution Provider)’로 거듭나는 방향이 요구됩니다.

 

하드웨어는 범용적이고 표준화된 형태로 공급하되 그 안에 들어가는 센서 제어와 액추에이터 구동 알고리즘 역량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트 프레임을 잘 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 전기차의 효율을 높이는 발열 제어 솔루션이나 탑승객의 신체 변화를 감지하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보유한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로벌 통합 플랫폼이 가동될 때 당당하게 자신들의 기술을 '플러그인(Plug-in)'하며 정당한 가치와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함께 굴리는 톱니바퀴'의 싸움

모빌리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술의 혁신은 늘 거대한 인프라와 문화의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기술은 앞서 가는데 공급망의 문화는 여전히 과거의 수직계열화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개별 기업의 독점적 경쟁력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을 지닌 대형 테크 기업들에 대응하려면 제조 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파워트레인의 구동력과 시트의 안락함이 조화를 이루며 달리는 자동차처럼, 대기업의 든든한 상생 지원과 협력사의 SW 역량 혁신이라는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야 합니다.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 앞서 나가는 기업은 가장 큰 공장을 가진 기업이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구와 손을 잡고 얼마나 신속하게 개방적이고 건강한 공생 생태계를 구축하느냐'를 깨달은 기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과거의 종속적 구조를 벗어나 수평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만이 자동차 산업 전환기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방정식이 될 수 있습니다.

 

 

 

 

ㅣ권용주

 

(현)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 겸임교수
MBC라디오 <차카차카> MC
<모빌리티 미래권력> 저자
국토교통부 모빌리티 혁신심의위원(2021-2022)
국회 미래연구원 모빌리티 부문 자문위원(20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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