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동차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며 시대의 기억 속에 자리한다. 모터스포츠에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모델이든, 시대를 앞선 디자인과 기술로 시선을 사로잡은 차든, 심지어 대중 브랜드의 평범한 모델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아이콘이 된다.
자동차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개인의 경험 속에서 재구성된다. 어릴 적 그렇게도 넓어 보이던 운동장과 교실이 성인이 되어 다시 마주하면 의외로 좁게 느껴지듯, 꿈꾸던 차를 실물로 만날 때도 사진이나 영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찾아온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은 자동차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기술 발전으로 3D나 가상 체험을 통해 자동차 전시를 실감나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지난 130년 넘는 자동차 역사 속 기념비적 모델들을 한자리에 모아 ‘살아 있는 전설’로 증명하고 있다. 동시에 미래를 향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새로운 도전자들이 무대에 오른다. 자동차 역사가 깊은 영국과 독일, 자동차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은 물론이고, 이제는 중동까지 그 무대가 확장된다. 올 하반기 12월까지 이어질 주요 전시들을 살펴보자.
1. 영국 굿우드,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는 축제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 (7월)
굿우드 리바이벌Goodwood Revival (9월)
영국 잉글랜드 남부 웨스트서식스 주 치체스터 시에 있는 굿우드 영지에서는 매년 여름과 가을, 자동차 애호가들을 불러모으는 두 가지 대표 행사가 열린다.
지난 7월 열린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는 1993년 찰스 고든레녹스 리치몬드 공작이 창설한 이래 세계적인 자동차 축제로 자리 잡았다. 참고로 그의 할아버지 프레더릭 공작은 1930년대 초 오스틴 팀에 합류해 브루클랜즈 500마일에서 우승했고, MG Midget 팀을 만들어 브루클랜즈 더블 트웰브에서 승리를 거둔 뛰어난 레이서였다. 이후 굿우드 서킷을 창설하며 영국 모터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조부의 뜻을 이은 찰스 공작은 가문의 전통과 영지의 역사를 바탕으로 1993년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의 창설을 주도했다.
벌써 30년이 넘은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는 4일의 행사 기간 동안 전세계 고성능 자동차와 모터스포츠의 전설적인 인물들, 레이스카들이 모인다. 그냥 전시만 하는 행사였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매년 주제를 정하고 그에 걸맞은 브랜드나 경주차를 집중적으로 선보여 볼거리가 풍성해진다. 코로나19 때문에 오프라인 행사가 취소된 2020년 이후에는 미래의 자동차와 모터스포츠에 대한 기술들에 집중하고 있다. 2022년에는 혁신가와 미래 기술에 집중해 하이브리드, 전기 모터를 이용한 경주차들과 신기술들을 대거 선보였고, 2024년 주제인 ‘내일의 레이싱(Racing for Tomorrow)’에선 현대자동차가 아이오닉 5N과 RN22e 롤링랩 콘셉트카 등을 내놓은 바 있다.
올해 행사는 F1 75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와 함께 현대자동차 아이오닉 6N 공식 데뷔, 제네시스 브랜드의 내구 레이스 진출 발표가 주목받았다. 특히 행사장 하이라이트인 힐클라임에서 레이스카들이 언덕길을 실제 주행하며 기록에 도전해 현장의 열기를 더했다.
이어 오는 9월 12일부터 14일까지는 같은 영지의 모터 서킷에서 굿우드 리바이벌이 열린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용 활주로였던 웨스트햄프넷 공항을 개조해 1948년 오픈한 3.89km 길이의 이 서킷에서는 1948~1966년에 제작된 클래식카와 다양한 레이스카, 모터사이클이 실제 경주를 펼친다. 또, 참가자와 관람객 모두 1950~60년대 복장을 갖추고 참여해 고전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레이스’를 그대로 재현하는 무대라는 점에서, 굿우드 리바이벌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인 축제로 통한다.
2. 미국 몬터레이, 럭셔리와 헤리티지의 정점
몬터레이 카 위크Monterey Car Week (8월)
월 8일부터 17일까지 열흘 동안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카운티 안의 여러 장소에 다양한 자동차 행사들이 열렸다. 매년 여름을 장식하는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페블 비치 골프장 18번 홀 그린 위의 ‘페블 비치 콘코르 델레강스(Pebble Beach Concours d'Elegance)’다.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클래식카부터 역사적 의미가 큰 슈퍼카, 최신 콘셉트카들이 최초 공개되기도 하며, 유럽의 이탈리아 코모 호수변에서 열리는 빌라 데스테 콩쿠르와 쌍벽을 이루는 이벤트이다. 1950년 로드 레이스의 부대 행사로 시작된 이 전시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무대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클래스 심사위원들과 특별히 초청받은 명예 심사위원들이 출품된 차의 역사, 보존상태, 디자인, 오리지널리티의 유지 유무, 소유한 스토리 등을 엄격하게 심사하며, 다양한 클래스별로 1~3등을 선정하고 전체 우승자인 ‘Best of Show’를 뽑는다.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 디자인 센터장 이상엽 부사장이 2019년 벤틀리 100주년을 기념해 명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두 번째 주요 행사는 ‘더 퀄리(The Quail, A Motorsports Gathering)’이다. 카멜 밸리의 퀄리 로지 & 골프클럽에서 열리는 프라이빗 이벤트로 5000명 미만으로만 입장할 수 있다. 이는 슈퍼카와 럭셔리 브랜드의 원오프 모델이 공개되는 등 매우 상징적인 무대로 꼽힌다.
또, 몬터레이 카 위크도 경주차들이 달리는 행사가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레이싱 서킷 중의 하나인 라구나 세카 레이스웨이에서 열리는데, 500대가 넘는 역사적인 레이스카들이 모여 제작 당시의 레이스 카테고리별로 모여 달린다. 1920년대 이후의 F1 경주차는 물론이고 전설적인 르망의 그룹C 경주차, 미국 고유의 모터스포츠인 트랜스암이나 나스카 경주차들까지도 총출동한다. 70년대 F1 경주차들이 라구나 세카 트랙의 자랑인 코르크 스크류 코너를 달려 내려오는 모습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감동을 준다.
행사 기간 몬터레이 시내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클래식카 경매인 RM 소더비 경매가 진행된다. 이곳에서 2018년 1962년 페라리 250 GTO가 4840만5000달러(약 677억 원)에 낙찰되며 최고가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올해에는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소유했던 페라리 F50이 924만5000달러(약 130억 원)에 낙찰돼 주목받았다.
3. 독일 뮌헨, 미래 모빌리티를 향한 교차점
IAA 모빌리티 (9월)
9월 9일부터 14일까지 독일 뮌헨에서는 유럽을 대표하는 모터쇼 IAA 모빌리티가 열린다. 이 행사는 2021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던 전통 있는 모터쇼였으나, 2022년부터 뮌헨으로 자리를 옮겨 ‘도심 속 모터쇼’라는 새로운 콘셉트를 내세웠다. 뮌헨 시내 곳곳에서 신차 전시와 시승, 미래 모빌리티 체험이 함께 진행되며, 박람회를 넘어 시민 전체가 즐기는 도시 축제로 변모했다.
참여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전통적인 완성차 제조사뿐 아니라 자율주행과 전동화 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테크기업,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스타트업까지 합류하면서 ‘자동차 전시’에서 ‘미래 교통 산업 전시’의 성격을 띄게 됐다.
또한 기후변화와 지속가능성을 핵심 화두로 두고 있는 IAA는 온실가스 배출 감소, 리사이클링 전략, 전동화·수소차 기술, 교통 인프라 혁신에 대한 세미나를 병행한다. 일반 관람객을 위한 신차 전시도 진행되지만, 기업과 기관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비중이 높아 모빌리티 업계 관계자들에게는 글로벌 네트워킹의 장으로 자리잡았다.
4. 카타르, 제네바 모터쇼의 새로운 무대
카타르 제네바 모터쇼Geneva International Motor Show Qatar (11월)
11월 27일부터 12월 6일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모터쇼다. 중동에서 열리는데 왜 스위스 도시 제네바의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할 수 있다. 1905년 시작된 유럽 최고 권위의 제네바 모터쇼가 스위스에서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자, 2025년부터 카타르가 그 이름을 이어받아 개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제네바 모터쇼는 중립국 스위스의 특성상 자국 자동차 브랜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브랜드들이 유럽 진출을 위한 신차와 혁신 기술을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무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모터쇼의 매력이 떨어지고 완성차 업체들의 불참이 늘자, 카타르가 브랜드를 인수해 새로운 무대로 만든 것이다. 이제는 제네바 조직위원회와 카타르 정부, 자동차·모빌리티 기관이 공동 주최하는 형식으로,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의 공식 연장선에 있다. 개최지 특성에 맞게 중동과 아시아 시장을 겨냥하고, 하이엔드 컬렉터를 대상으로 한 미래차와 초고가 모델 전시도 강화되었다. 미래지향적인 럭셔리와 혁신적 기술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지, 기대해 볼 만하다.
■ 글. 이동희 자동차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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